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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양동교회

양동교회정면
주소
호남로 15 (양동)
전화
정보없음
추천
2
이용시간
휴무일
이용요금
무료
주차시설
주차장 없음
장애인시설
없음

<문화재 정보>

지정종목 : 등록문화재 제114호 / 목포 양동교회
분 류 : 등록문화재/기타/종교시설/종교시설
수량/면적 : 1동, 1층(첨탑4층) 건축면적 448.33㎡
지정(등록)일 : 2004.12.31
소 재 지 : 전남 목포시 호남로 15 (양동)
시 대 : 일제강점기
소유자(소유단체) : 한국기독교장로회


[사진출처]
본 저작물은 문화재청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우리지역문화재'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전남 최초의 교회이자 근대문화의 통로, 양동교회

양동교회는 남도 근대문화의 1번지를 상징하는 목포의 문화공간으로 목포의 개항이 예견되자 미국의 선교사들은 목포를 새로운 선교기지로 선택하였고 이에 목포는 지리적 특성상 내륙과 도서지역을 오가면서
선교활동을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서남부 선교의 중심 지역으로 급성장하였다. 그 중심이 된 교회가 바로 전남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다.

목포에 선교사가 처음 발을 디딘 시기는 1894년 4월 18일이었고, 그는 선교사 레이놀즈였다. 그는 목포 지역을 여행하면서 선교 가능성을 타진하였고 이후 1897년 10월 목포 개항과 함께 본격화 되었다. 이 교회의 설립 시기는
1897년 3월 선교사 유진 벨과 20여명의 성도가 함께 천막을 치고 선교활동을 시작으로 목포 개항 이후 1898년 5월 예배를 시작으로 양동교회를 설립하고 1900년에 14평 남짓한 한식 기왓집을 사용하다 신도수가 늘어남에 따라
1910년 현재의 위치로 양동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

교회 건물의 좌측면 유리창 상부에는 건립 시 새겨 놓은 ‘대한융회4년(大韓隆熙4年)’이란 글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 연대를 알수 있다. 융희는 대한저국의 마지막 연호로 융희4년은 1910년을 의미한다. 이는 대한제국의 흔적을 찾아 볼수 있는 자료가 양동교회 외벽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반대면에는 한글로 ‘쥬강생일천구백십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건물을 처음 세웠을 당시에는 남성과 여성의 출입구가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지금도 그 당시의 양쪽 출입구가 남아 있다.

현 양동교회 건물의 원래 구조는 장방형의 단순한 단층석조였다. 1982년에 정면 중앙부에 5미터 돌출시킨 고단부(4층구조)를 추가로 설치하여,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근대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14호로 문화재청에 등록되었다.양동교회는 종교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목포의 근대문화 발달과정과도 많은 관련이 있다. 선교사들의 활동 가운데 의료 및 교육 활동은 목포의 근대문화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있는데 선교사들이 개척지역에 주민들과 친숙해지는 방법으로 의료나 교육을 통한 방법이 효과적이었으며 이에 1914년에 프렌치 기념병원이 생겼고 동시에 교육분야에서는 1903년 미션스쿨이라고 할 수 있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교육기관들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주입교육이 우선시 되는 상황속에서도 교사들에 의해 민족정신 주입이 가능했기에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4.8만세운동이나 이후 목포의 항일운동에 두 학교가 앞장서게 되었는데 이는 양동교회와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다. 양동교회 마당 한쪽에는 1987년 10월에 건립한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는 선교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그 역사성을 기념하고 있다.

- 목포시 발간 ‘ 목원동 이야기‘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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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및 주변정보

목포 양동교회 : 목포시 호남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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